게으름

나는 별로 게으른 편은 아니다.
새벽형 인간이고 또 야행성 인간이기도 하다. 하루 네다섯 시간 수면이 고작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잠이 적기도 하고, 서울 외곽에 살다보니 출퇴근 거리가 멀었던 탓도 있었다. 또한 음주의 관습 탓도 있다.
하지만 일상의 러닝타임이 긴 만큼 게으름이 도사릴 틈 또한 많다.
운동에 게으르고 주위 사람들과의 살가운 대화에 게으르고, 새로운 시도에 게으르고 자기 계발에 게으르다.

매일 글 한 편을 쓴다? 그건 아마도 내 게으름의 편력기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강박 속에 최소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 질문을 매일 하나씩 허공에 날려 보게 될 것 같다.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by 예송 | 2009/11/21 11:19 | 트랙백 | 덧글(1)

이리

어둠 속에서 당신은 잠든 나의 본성을 깨운다
부르르 진저리를 치거나 교성을 지르며
나는 눈을 뜬다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동안
나는 점점 뜨거워진다
가압과 감압 사이의 리드미컬한
진동이 숲과 숲을 꿰뚫고
두툼한 능선을 넘나들며
대지의 복잡하고 정교한 신경망을 팽팽히 이어준다

과도한 집중이 불러올 일탈을 경계하며
나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한다
밤의 경계를 넘어 와 곁을 스쳐가는
개체끼리는 서로 겸손하게 눈을 내리깔기도 하지만
내게 저항하는 밤하늘은 다하지 않았고
찬바람 속에서 더욱 달아오르는
내 하부의 격렬함은 당신의 온몸을 달구고
당신의 열정은 다시 내게 전해진다

어느 땐가 나는
당신과 함께 야생동물과도 교접한 일이 있었다
수백 수천의 날것들이 내 눈빛과 교접하는
쾌락의 번제에 동참하기도 했다
잡아먹어도 먹어도 나는 근원적인 허기로 부르르 몸을 떨고
악, 악, 악
밤의 악셀러레이터를
당신은 더 깊숙이 밟는다

두물머리 근처
갓 쪼갠 사과의 단면 같은
촉촉한 새벽 공기
혓바닥은 강렬하게
바닥을 핥는다
바닥과의 이 끈끈한 마찰을 통해
당신의 쾌락은 가속을 더한다

이것은 나의 뜨거운 혓바닥이며 탄력의 근원이며
나의 둥근 발바닥이다
그리고, 사계절용이다

by 예송 | 2009/11/20 16:09 | 창작시 | 트랙백 | 덧글(0)

김남주 - 사랑은

사랑은
                           김남주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by 예송 | 2009/11/19 16:20 | 좋은 글*책*사람 | 트랙백 | 덧글(0)

청과조합 - 파블로 네루다

 

청과 조합

                   파블로 네루다



나팔 소리가 들리고

모두가 지표를 향해 앉았을 때

여호와 신은 우주의 분할을 선언했다.

아나콘다, 포드자동차, 코카콜라 회사

그리고 청과조합을.

내 조국과 남미 대륙의 허리를 가로챘다.


이들은 재산을 모아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이른바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신음하는 민중의 시체 위엔

거재를 쌓아올린 覇者(패자)들의 불안한 영화

그리고 그들은 내 조국의 위대함과

깃발과 자유를 약탈하고 거대한 희극을 상연했다.

그들은 모든 기업을 강탈하고

파리떼같이 추한 폭군들에게

월계관을 씌웠다.

트루히요, 타호, 카두아스, 마르띠네트, 우비코-

이들은 하나같이 파리떼들로서

민중의 고혈을 취해

똥구더기 위를 붕붕거리며 날아다닌다.

파리떼들은 하나같이 압제와 폭정의 화신들

파리떼의 왕국서 그들은

청과조합은 커피, 과일 등을 배에 가득가득 채워

빈사의 조국을 전리품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어디엔가에서는 언제고

항구에 쌓아둔 설탕 더미 속에서

가스에 질식당한 인디언들은

몸이 지쳐 죽어간다.

이름도 없는 물건처럼

몇 번이고 고꾸라지면서

썩은 고기와 문드러진 과일통 속에서

사지를 뻗으며 죽어간다.

by 예송 | 2009/11/09 16:42 | 좋은 글*책*사람 | 트랙백 | 덧글(0)

15층 아파트 계단 내려가기 - 이병승

 

15층 아파트 계단 내려가기

                                                          이병승


엘리베이터 괴물이 꿀꺽 삼켰다
내 동생은 내가 구해야지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동굴로
부리나케 뛰어내려간다

마법의 책과 지도가 든 배낭을 메고
모퉁이마다 도사린 괴물들
마법의 숫자 버튼을 눌러 물리친다

쇠사슬 괴물 14
녹슨 바퀴 괴물 13
박스 괴물 11
그릇 괴물 9
먼지 괴물 7
초록눈 괴물 6
그림자 괴물 3
메아리 괴물 2

마침내 지하세계
괴물의 입을 향해 주문처럼 외친다
“벌려라, 입!”

내 동생 도끼눈으로 나온다
“오빠!! 너무해!!”




헬리콥터



학교 끝났다, 오버

신발주머니 가방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며
달린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

발이 땅에서 떠오르는 아이들
모두다
헬리콥터 되어

난다, 난다
신난다




등굣길


아침에 꼭 있다

침 흘린 자국 허연 아이
도깨비 뿔처럼 머리카락 삐죽삐죽 솟은 아이
왕방울 눈곱 단 아이
졸면서 비틀비틀 가는 아이
왕왕 서럽게 울면서 가는 아이

나?
나는 또 신발주머니 놓고 왔다
헤헤

by 예송 | 2009/11/09 16:32 | 좋은 글*책*사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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