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형 학생과 속진형 학생 오래 된 하루

학습부진아 책임지도 연수를 다녀왔다.

서울시교육청의 부진학생 지도 정책 방향에 부진학생율 0% 달성이라는 목표 설정에 대해 교사들의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들이 활동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참으로 다양한 측면들이 있는데, 그 중 유독 학습능력 하나만을 따로 떼어내어 '부진'이라는 주홍글씨를 달아 주어야 하는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습부진'과 '학습능력우수'라는 말을 '노력형'과 '속진형'이라는 말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용어 자체의 애매성뿐만 아니라, 학습능력을 인간에 대한 평가의 척도로 삼는 태도에서는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용어이다.
마치 '학습부진'을 해소하면 교육이 지닌 모든 문제점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학습만능주의가 이 정책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물론 착각이다.
서울 교육의 정책 목표 중의 첫째가 '민주시민 양성'인데, 유독 학습에서만큼은 전제적인, 전체주의적인 시각이 완고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분명 경쟁을 당연시하고, 경쟁에서 앞서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학습을 잘 하면 인성이 좋아질 것이다.
학습을 잘 하면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습을 잘 하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학습을 잘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에 겉으로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학습부진 학생 구제를 마치 교육복지의 구현인 것처럼(무상급식은 반대하면서) 여기는 생각 속에는 이런 극단주의가 내재되어 있다.

아이들을 삶의 주체로 보지 않고, 경쟁의 경주마나  평가의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학습부진은 곧 삶의 부진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아이들을 몰아세우는 것은 아이들의 행복지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학습 능력 향상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진심어린 설득이다.

학습부진율 0%
왠지 이 '0' 이라는 수치는, 학습 이외의 다른 측면은 바라보지도 말고, 꿈꾸지도 말고, 모두 포기하라는 말처럼 잔혹하게 느껴졌다.

빈손 창작시

 

어느 날 나그네가 내 집을 찾아와

손을 내밀며 빈손이 시리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흔쾌히 그의 손을 맞잡고 내 마음 곳곳을 살펴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지니고 다니다가 진흙탕에 버리고

빈손으로 내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는 잠시 서운해 하고 그를 원망하고 화를 내다가,

다시 그의 손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세상을 떠돌다 내가 준 것을 내다버리고는

빈손으로 내 집을 찾기 일쑤였습니다.

이제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도 내게는

설움도 원망도 분노도 없습니다

더 이상 내 마음에는 그에게 주어서 보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움도 원망도 분노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준 것들이 내 마음에 처음처럼 살아 있을 뿐아니라,

같은 것을 한 사람에게 또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다시 빈손으로 세상을 다니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내가 아닌 다른 것으로 항상 충만하기 바랍니다


박영희 - 아내의 브래지어 좋은 글*책*사람

아내의 브래지어

                                    박영희

 

누구나 한 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 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 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 박영희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

 

 


최종천 - 시는 그렇게 죽어라 좋은 글*책*사람

시는 그렇게 죽어라
                                             최종천


나무를 읽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시를 써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그렇게 많은 시를 써서 남겼으나
나무는 읽혀지지 않고 세상은
갈수록 핏기를 잃어간다
이제 나무를 읽는 방법의 시를 쓰리라
지구에 빙하기가 임박한 어느 날
누군가 나무 대신 시집을 난로에 태우며
말하리라! 이 시집이 나무의 유언처럼 읽힌다고
나무가 시집보다 귀해지면
시인들은 시집을 출판하지 않을 것인가?
나무를 읽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
내 시집은 그렇게 태워져라
그렇다, 시는 나무를 읽는 방법이어야 한다
이제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살구 창작시

흙에 살풋 물들던
첫눈의 빛깔로 분홍의 꽃무리는 왔다가 가고
어린잎들은 태양의 등 뒤에서 무성한 서릿발을 키우고 있습니다
처마 끝 고드름이 앙다물었다 방울방울 빚어 내리던
차고 맑은 물방울들의 형상으로 푸른 열매는 가지마다 맺혔습니다

입 안에 침이 고이고,
미처 파아란 볼을 잎새에 숨기지 못한
살구 하나 따서 입에 물고 눈이 시리도록 신
겨울의 풋맛을 봅니다

대지에 여름 속의 겨울이 무성한 어느 날엔가
노랗게 익어간 과육을 둘로 쪼개어
하나의 완성이 품고 있는
차갑고 완고한 계절과 아픔을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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